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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3인 인터뷰] ② 이장미 “10번의 수술, 포기 안했다”

작성일 2018.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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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동아시안컵 한일전에서의 이장미. 2010년 동아시안컵 한일전에서의 이장미.12년간 국가대표 수문장 자리를 지켰던 전민경, WK리그 원년인 2009년 대교의 우승을 이끌며 MVP를 수상했던 이장미, 2009년 여자축구 최초로 유럽에 진출했던 차연희가 2017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파란만장한 선수 생활을 마무리 짓고 인생 두 번째 출발선 앞에 선 셋을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가 만났다.

‘비운의 축구 천재’는 흔한 수식어이긴 하지만, 이장미(33)에게도 이 수식어를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스무 살에 처음으로 십자인대 부상을 당한 이장미는 이후 양쪽 무릎 도합 10번의 수술을 견뎌야 했다. 17세에 A매치에 데뷔할 정도로 많은 기대를 받았던 테크니션이었고, 여러 차례 부상에도 꿋꿋이 다시 일어섰던 이장미다.

이장미는 WK리그가 출범한 2009년에 우승과 함께 MVP와 득점왕을 차지했는데, 당시 이미 네 차례의 무릎 수술을 거친 뒤였다. 2010년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해 6개월 간 뛰었고, 대교로 돌아온 뒤에는 WK리그 역사에 남은 23연승 기록(2010년 7경기+2011년 16경기)과 2연속 우승(2011, 2012년)에 일조했다.

이장미는 자신을 항상 따라다니던 부상과 그로 인한 통증, 그리고 편견을 떨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쟨 끝났다’며 이장미를 포기한 이들에게 보란듯이, 이장미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장미는 수고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당당하게 새로운 출발에 나설 수 있다.

-은퇴를 결정한 배경은 무엇인가?
박남열 감독(2009~2012, 2014~2016 대교 감독)님이 꼭 대교에서 은퇴하라고 하셨다. 원래는 수원FMC에서 은퇴할 생각도 있었는데, 그 말이 생각나서 어렵게 대교에 복귀하게 됐다. 복귀하고 처음에는 힘들었다. 경기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좀 오버했다. 경기에 못 나가면 내 스스로가 컨트롤이 잘 안 되더라. 욕심이 많았다. 좋아서 시작한 축구인데 즐겁게 하지 못했다. 작년부터는 조금씩 달라졌다. 마음을 내려놓고 나니 다시 축구가 좋아졌다. 즐겁게 축구를 하다 보니 그만둔다면 딱 이 때라고 생각했다. 축구가 직장이 아니라,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축구가 정말 좋은 상태에서 은퇴하고 싶었다. 그맘때 팀 해체 소식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은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주변 반응은 어땠나?
다들 ‘그래, 너 할 만큼 했다. 쉬어라’ 이런 반응이었다(웃음). 근데 내가 몸이 막 근질 거려서... (옆에 있던 전민경이 “넌 못 놀 팔자”라며 웃었다.) 대교의 WK리그 원년 우승을 이끌었던 이장미는 결국 대교에서 은퇴했다. 대교의 WK리그 원년 우승을 이끌었던 이장미는 결국 대교에서 은퇴했다.-은퇴 후의 계획은 세워뒀나?
선수 생활을 할 때는 사실 지도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지도자 생활을 하는 선배들이나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도자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훌륭한 여성 지도자들이 많이 활약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여성 지도자를 팀 관리인 정도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런 게 싫었다. 여성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을 키우고 싶다. 지도자 강습에 들어갔는데 힘들기도 했지만 재미있었다.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는 경험을 해보니 보람을 많이 느꼈다. 아이들이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좋아서 따라오는 게 보이니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중요한 경기를 뛰면 설레서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나. 그날도 그랬다.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못 잤다. 그러고서 지도자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축구인생을 통틀어 가장 의미 있는 물건으로 축구화를 가져왔는데?
처음 무릎을 다쳤을 때 신었던 축구화다. 대학교 1학년 겨울에 연습경기를 뛰다가 다쳤다. 이후로 10번의 수술을 했다. 아프지 않은 몸으로 한 경기라도 뛰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늘 아팠다. 이 축구화는 아프지 않았을 때 신은 마지막 축구화다.

-아무래도 가장 아쉬웠던 순간일 것 같다.
그때 십자인대를 안 다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때 안 다쳤다면 10번의 수술도 없었을 거고, 그럼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다치면서 좀 착해졌다. (옆에 있던 차연희 “맞다. 아팠던 덕분에 사람이 됐다.”) 다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철이 안 들었을 수도 있다(웃음). 이장미는 선수 생활 중 가장 의미 있는 물건으로 대학 시절의 축구화를 꼽았다. 이장미는 선수 생활 중 가장 의미 있는 물건으로 대학 시절의 축구화를 꼽았다.-아픈 와중에도 독일 진출을 했다. 독일 생활은 어땠나?
정말 힘들었다. 다시 가라고 하면 못 갈 것 같다(웃음). 한국처럼 단체로 숙소에서 지내는 게 아니라 혼자 지내야 해서 밥 챙겨 먹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영양실조가 올 뻔 했다(웃음). 원래 고기를 안 좋아하는데 몸이 허해져서 고기를 좀 먹어야겠다는 느낌이 오더라. (옆에 있던 차연희는 당시 바트노이에나르에서 임대 생활 중이던 자신에게 이장미가 찾아왔기에 함께 고기를 사다가 구워먹은 일화를 들려줬다.) 나는 마트에서 뭘 사야할 지도 잘 몰랐다. 집에서 훈련장까지의 거리도 멀어서 대중교통을 타고 혼자 오가는 것도 정말 힘들었다.

-그렇다면 가장 좋았던 순간은 언제인가?
2009년에 우승하고 MVP 받았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때 (차)연희랑 (박)희영이가 없어서 힘들었는데(차연희와 박희영은 2009년에 독일 바트노이에나르로 임대를 떠났다.)도 다들 열심히 했다. 다치고 나서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쟤 끝났다’ 그런 얘기... 너무 화가 났다. 잘하려고 하면 또 아프고, 또 아프고 하니까 정말 힘들었다. 2009년에도 아프긴 했지만 그런 시선들을 깨고 싶어서 정말 이 악물고 했다. 그러게 열심히 한 결과로 좋은 성과를 얻은 거라 기뻤다. 기뻐서 많이 울기도 했다.

-축구팬들에게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나?
음... 포기하지 않은 선수. 나는 포기한 적이 없다.

-선수 이장미에게 한 마디 해준다면?
미안해. 그리고 수고했다.

글=권태정
사진=대한축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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